Morning Sun Café.net - 아침해 카페
시집 살이
김복영
시집가는 날 예식이 끝나고 나니 하얀 눈이 가볍게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신혼여행을 안 가기로 하고 동두천에 있는 시댁으로 택시를 타고 갔다. 택시가 도착한 곳은 시댁에서 약100M 떨어진 대로변에 우리를 내려놔 주었다. 동래 사람들이 모두 나와 우리를 맞이했다.
집에를 들어가니 많은 사람들이 집으로 딸아 들어왔다. 우리남편이 알고 보니 학 열이 높은 줄을 이제야 알았다. 내가 보기에 할머니 모습인데 날 보고 아주머니라고 하고 중년 분들은 날보고 할머니라고 하면서 인사를 하였다. 나는 어찌 할 바를 몰라 아무 말도 못하고 어리둥절했다. 이런 일도 있나싶었다.
동래사람들은 혼수에 관심이 많았나 보다.
서울 색시라 예쁘다고 하고 그때 당시 혼수로 장만한 호마이까 장롱과 재봉틀을 해갔더니 혼수 잘 해 왔다고 칭찬이 자자했다
그 다음날 새 색시의 옷차림은 예쁜 한복을 입고 아침이면 시부모니께 인사드리고 긴 행주치마로 한복치마를 전체를 감싸 듯 여며 입고 부엌으로 나갔다.
어머니께서는 큰 가마솥에 물을 가뜩 부어놓고 작은 질그릇 솥 두 개 중 하나는 쌀을 안쳐놓고 다른 한쪽은 시래기 된장을 풀어놓으시고 나한테 불을 때라 하신다.
나는 불만 때면 되는 줄 알고 상세히 여쭈어 보지도 안고 마냥 불만 피우고 있었다. 서울에선 연탄불만 보다가 장작으로 밥을 짖는 것은 처음이라 실 수 가 많았다. 끓을 때와 뜸을 드릴 때 가 불 조절이 다른 것을 모르고 마냥 불을 태웠더니 결과는 밥을 짖는 질그릇은 바닥이 넓어서 넓은 범위가 다 누룽지가 되었다.
시부모님과 남편을 누룽지를 드릴수가 없어서 나만 먹고 있었다. 불 때는 방법이 쉽게 터득이 안 되어 몇 때를 누룽지로 밥을 먹다 보니 퇸 마루에 나와 울기도 했다.
나하고 비슷하게 시집을 온 손녀 벌 되는 며느리가 시집을 왔다. 그 며느리는 일 잘 한다고 칭찬이 자자했다.
그 며느리는 시집오기 전에 일을 많이 했다한다. 부러웠다. 딸 하나로 자란 나는 일을 전혀 해 보지 안했기에 이런 부끄럼을 느끼게 되었다.
또“ 한번 실수는 어느 날 시누님이 오셨다, 시어머님께서 점심준비를 국수로 털렝이 국수를 만들라고 하셨다. 처음 듣는 요리기에 긴장을 하고 여쭈어 보았다. 물을 많이 붓고 그 안에 김치를 썰어 넣고 끓으면 국수를 넣으라고 하셨다. 김치와 국수를 양을 얼마나 넣는 것을 모르고 내 생각 데로 하였다.
국수보다 김치가 많이 넣었기에 실패된 요리가 되었다.
착한 시누님이 김치를 꺼내 놓으니 그때 국수와 김치가 배합이 되어 맛있는 국수 요리가 되어 아무 탈 없이 점심을 드렸다. 시누님 덕분에 위기를 넘기게 되어 고마워했다.
시댁이 시골이라 전기가 없어서 밤이 되면 화장실 가기가 매우 어려웠다.
외부에 있어서 남편이 같이 화장실 앞에서 기다리고 나를 되리고 들어갔다.
물은 집 밖에 작은 우물이 있어 질그릇 동이에다 바가지로 물을 길어서
머리위에 똬리를 위에 동이를 올려놓고 집으로 한발 두발 띠어 놓으니 마구 흔들려서 얼마나 어려운지 집에 들어가 보니 동이 안에 물이 반 밖에 없었다. 내가 일 하는 게 어설퍼도 시어머님께서 한번도 나무람을 안 하셨다.
시댁에 인품이 고우셔서 하나도 어려움 없이 하루 하루 귀염을 받고 잘 지냈다.
시집 간지 두 달이 지났는데 아버님께서 동두천 시내에다 집을 사 놓으셨다.
라고 하신다. 방이 둘이였다. 안마당이 넓어서 거기에다 텃밭을 만들어 야채를 심어서 먹으라고 하셨다.
방하나는 세를 놓으라 하셨고 임대를 받아 생활에 도움이 되라하셨다. 봄이 되니 분가를 해 주시면서 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들을 골고루 챙겨주셨다. 자상하신 부모님이셨다.
철없던 내 나이 24세 부모님께 고마움도 모루고 의뢰이 해주시는 줄 아시고 고마워하는 마음도 떠오르지 않았다.
몇 년이 흘러 친구를 만나 그동안 시집가서 사는 예기로 수다가 많았다.
예기를 들어보니 맏며느리로 시집간 친구는 어린 시동생 시누이를 도시락 몇 개를 싸서 학교를 보내고 나니 시부모님 수발과 집안 일이 많았다 한다. 어느 친구는 집이 없어 셋방살이를 하면서 어렵게 살았다한다. 이루 헤 아 릴 수 없이 고생을 많이 했다한다.
그 친구들 고생한 이야기를 들으니 눈물이 낳다. 그때서야 부모님에 고마움이 떠올라 정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착한 며느리가 되어서 효도를 해야지 다짐했다. 편찬 으시면 병원도 잘 모시고 다니고 용돈도 잘 들였다.
시부모님한테는 귀여움을 많이 받는 막내며느리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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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찾은 실버타운
김복영
삼 남매를 다 결혼을 시켜 분가를 시키고, 우리 두 부부만 남았다. 서운함과 시원함이 교차하면서도 먼 길에 있는 직장인 꽃집에 출근을 하였다. 우리의 곁에서 떠나간 자식들은 잘 살고 있었다. 우리는 열심히 일하면서 세상사는 재미를 느껴갔다.
호사다마라 했던가.60대 초반 어느 날 손가락과 손목이 너무 아프기 시작했다. 가위질을 할 수가 없었다. 꽃집을 운영할 수가 없었다. 여기저기 병원을 찾아다니며 검사를 받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차도는 없었다. 전신에 마비가 오고 온 몸은 붓고 통증 때문에 견딜 수가 없었다.
마지막 안 암동에 있는 고대병원에서 종합 검사 결과 루마티스 관절염 판정을 받았다. 그 병원에서 집중적으로 치료를 받았다. 손가락이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발도 땅에 디딜 수가 있었다. 중풍 환자같이 어기적거리기는 할망정 걸을 수도 있었다. 시간이 지나자 온 몸이 부드러워지면서 내가 스스로 머리를 감을 수가 있었다. 병마에 시달리는 동안 남편은 1년이 지나도록 밥을 지어주고 내가 못 다한 일을 다해주었다. 남편의 소중함을 가슴 가득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함에도 마음이 슬퍼지고 알 수 없는 회한이 밀려왔다. 무엇을 위해 이렇게 정신없이 살아왔는지, 지금에 와서 나에게 남는 건 병 뿐이란 생각, 이렇게 죽어갈 수는 없다는 생각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나를 위해, 내 인생을 위해 살아보자고 마음먹었다. 지금까지 살던 집에서부터 탈피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찾은 것이 실버타운이었다. 아들 며느리를 데리고 바로 달려가 부부가 살만한 집을 골랐다. 당장에 남편 몰래 계약부터 하였다. 남편은 노인들만 사는 곳에 절대로 못 간다고 펄펄 뛰었다.
나는 이곳에 가야만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남편의 반대 같은 건 아랑곳 하지 않았다. 극약처방으로 “따로 살자.”고 까지 말을 했다. 할 수 없었던지 남편은 따라 왔다.
하루 이틀 살다보니 정이 들었던지 남편은 “이곳이 너무 좋다.”고 했다. 나를 위로하기 위해서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았다. 남편 친구들한테 매일 자랑하기 바빴다.
이곳 시니어스에서 짜여진 프로그렘 대로 따르며 즐거운 나날들을 보냈다. 하루하루 운동을 하니 몸이 조금씩 나아지는 것을 느꼈다. 운동도 종목마다 가르쳐 주는 선생님이 있어서 제대로 코치를 받아 잘 배웠다. 나는 탁구와 라인댄스, 포케볼, 대회에도 참가하고, 상도 타보았다. 일상이 즐거웠다. 노래 교실에서는 내 나이를 잊은 듯 노래를 신나게 불렀다. 내 몸과 마음이 정화가 된 것 같았다. 맑고 기분 좋은 마음이 이어졌다.
컴맹이었는데 컴퓨터 교육 신청을 했다. 컴퓨터를 배운다는 것을 큰 아들이 알고 컴퓨터와 복사기를 사서 보내주었다. 배움이 너무나 재미도 있고 신비스러워 컴퓨터에 푹 빠졌었다. 그렇게 배운 컴퓨터로 나의 모든 추억을 수록하고 시디에도 담아 저장해놓았다. 아들과 딸한테 내 컴퓨터 실력을 은근히 자랑도 했다. “어머니! 정말 자랑스럽습니다.”라며 좋아했다.
손녀와 손자들한테 이메일도 보냈다. “우리 할머니 멋있다.”고 친구들한테 자랑도 하였다 한다. 아이들 하고도 이야 기꺼리가 있어 너무 좋고, 아이들에게 답답한 할머니가 되는 것을 면한 것 같아 스스로 뿌듯하였다.
가끔 아침이면 몸이 뻣뻣해 지는 증상이 일어나곤 한다. 그럴 때마다 남편은 온 몸을 주물러준다. 남편 없으면 어떻게 살까! 가끔 엉뚱한 생각도 해본다.
죽을 것 같았던 내가 이곳 고창에 와서 제 2의 인생을 멋지고 아름답게, 건강해진 몸으로 잘 살고 있다. 이는 내 노력과 내 의지가 아니라 항상 내 곁을 지켜주는 남편과, 멀리 있으나 든든한 자식들이 있고, 이웃이며 취미를 같이 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걸 잘 안다.
그러기에 나는 그들과 계속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며 행복하게 살아가리라.
*옮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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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贊圭印
방문하신 그대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 답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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